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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과의 30년 전쟁

1232년 지금의 용인에 있던 흙성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의 화살에 몽골 장수 살리타가 쓰러졌고, 몽골군은 물러갔습니다.

몽골과 고려가 처음 만났을 때 두 나라는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었습니다. 1219년 두 나라 군대는 강동성에 웅거하며 버티던 거란 무리를 함께 무찔렀고, 이때 고려와 몽골은 서로 형제가 되기로 맹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 우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몽골이 지나치게 무거운 공물을 거듭 요구하면서 두 나라의 사이는 무너졌고, 1231년 8월 몽골의 첫 침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긴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중간중간 쉬었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거듭한 이 전쟁은 1259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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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줄에서 1231년, 1232년, 1236년, 1259년, 1270년을 찾아보세요. 세계 줄의 몽골 제국 띠는 1206년에 시작합니다.

섬으로 옮긴 조정

몽골군은 말을 타고 싸우는 군대였고, 바다에서 싸워 본 경험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무신 정권의 집권자였던 최우는 조정 안의 거센 반대를 누르고 결정을 밀어붙였습니다. 1232년 7월 개경에서 가까운 바다에 있는 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은 이 강화 천도를 고려가 그토록 오랫동안 몽골에 맞설 수 있었던 중요한 까닭의 하나로 꼽습니다. 그러나 그 무거운 대가는 섬 밖 육지에 남은 백성이 치렀습니다. 몽골 군대가 그들의 논밭을 몇 번이고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배경두 번째 침입은 1232년 8월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몽골군을 이끈 장수는 살리타였고, 살리타는 고려 조정에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해 12월 몽골군은 지금의 용인에 있던 작은 흙성, 처인성에 이르렀습니다. 이 성을 지킨 사람들은 정규군이 아니라 그 고장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그 가운데 승려 김윤후가 있었습니다. 싸움이 한창일 때 살리타가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는데, 기록은 이 화살을 쏜 공을 김윤후에게 돌립니다.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고려에서 물러갔습니다.

연표의 세계 줄과 나란히 놓고 견주어 보면 고려의 항전이 얼마나 두드러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 몽골은 1240년 키이우를 차지했고, 1258년에는 바그다드를 함락해 약탈했으며, 1279년에는 송을 정복하는 일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강화도에 있던 고려 조정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고, 자기 나라의 왕실과 나라 이름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세계의 큰 나라들이 잇달아 무너지던 때에 고려는 자기 이름을 지킨 것입니다.

대장경을 다시 새기다

고려는 이미 11세기에 불교 경전 전체를 나무판에 새긴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입니다. 1232년 몽골군이 이 초조대장경을 불태웠습니다. 그러자 조정은 1236년 대장도감이라는 특별한 관청을 두고, 경전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새기는 일에 나섰습니다. 부처의 힘을 빌려 침략한 적을 물리치기를 바란 것입니다. 『고려사』는 이 사업이 16년 동안 이어져 1251년에 끝났다고 적습니다. 그런데 경판 자체에 새겨진 간행 연도는 1237년부터 1248년까지입니다. 그래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6년을 준비 기간까지 합친 것으로 보고, 실제로 나무판에 글자를 새긴 기간은 약 12년으로 봅니다. 이 경판이 팔만대장경, 영어로는 트리피타카 코리아나(Tripitaka Koreana)입니다. 경판은 뒤에 1398년 해인사로 옮겨졌고, 지금까지 그곳에 있습니다. 문화 단원에서 이 경판을 더 자세히 다룹니다.

강화, 개경 환도, 삼별초

1258년 최씨 정권이 무너졌고, 이듬해인 1259년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습니다. 몽골이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국왕이 직접 몽골 조정에 와서 인사를 드릴 것, 그리고 정부가 섬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오는 출륙환도였습니다. 나이 든 고종 대신 태자가 몽골에 갔습니다. 하지만 개경으로 돌아가는 일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던 무신들 때문에 11년이나 늦어졌습니다. 1270년 마침내 조정이 개경으로 돌아가자, 전쟁 내내 싸운 정예 부대 삼별초에게 해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삼별초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몽골과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근거지를 먼저 진도로, 다시 제주로 옮겼습니다.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인 여몽 연합군은 1273년 이들을 진압했습니다.

  • 1219: 강동성 전투, 형제 맹약
  • 1231: 몽골 1차 침입
  • 1232: 강화 천도, 처인성에서 살리타 사망
  • 1236: 대장경 판각 시작
  • 1251: 대장경 완성
  • 1259: 몽골과 강화
  • 1270: 개경 환도, 삼별초 항쟁
  • 1273: 삼별초 진압
강화 천도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일
처인성1232년 살리타가 쓰러진 용인의 흙성
김윤후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쏜 것으로 전하는 승려
최우강화 천도를 단행한 무신 집권자
삼별초1270~1273년 진도와 제주에서 싸운 정예군
출륙환도섬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감
핵심 정리
  • 1219년 거란을 함께 친 몽골은 1231년부터 1259년 강화까지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 1232년 최우가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고, 섬은 끝까지 버텼습니다.
  • 1232년 처인성에서 살리타가 죽었고, 1236년부터 1251년까지 대장경을 다시 새겼습니다.
  • 1270년 개경으로 돌아갔고, 삼별초는 1273년까지 항쟁했습니다.
  1. 몽골의 1차 침입이 시작된 해는?
  2. 조정이 강화도로 옮긴 까닭은?
    • 몽골군이 바다에 약해서
    • 섬에 금이 있어서
    • 송이 요청해서
    • 개경이 물에 잠겨서
  3. 강화 천도를 단행한 사람은?
    • 최우
    • 최충헌
    • 공민왕
    • 김부식
  4. 1232년 처인성에서 일어난 일은?
    • 몽골 장수 살리타가 죽었다
    • 조정이 항복했다
    • 대장경이 불탔다
    • 강화를 맺었다
  5. 『고려사』는 대장경 사업을 1236년부터 1251년까지로 셉니다. 처음과 끝 해를 모두 세면 몇 년인가요?
  6. 고려가 몽골과 강화를 맺은 해는?
  7. 강화는 1259년, 개경 환도는 1270년입니다. 몇 년 뒤인가요?
  8. 1270년 삼별초가 일어난 까닭은?
    • 개경 환도와 함께 해산 명령을 받아서
    • 몽골에 합류하려고
    • 은으로 급여를 받지 못해서
    • 일본으로 가려고
  9. 삼별초의 근거지를 차례로 놓으세요.
  10. 몽골이 내건 강화의 주요 조건은?
    • 섬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오기
    • 불교 포기
    • 평양으로 천도
    • 청자를 모두 보내기
이 과정의 출처 (11)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contents.history.go.kr): 한국사 연대기 고려 「후삼국의 통일」「노비안검법」「광종」「최승로」「최승로 시무28조(고려사)」「귀주대첩」「천리장성 수축」「윤관의 9성 설치」「여진족이 건국한 금의 팽창」「거란(요)의 건국과 발전」「발해 멸망」「이자겸의 난」「무신정변」「교정도감」「만적의 난」「몽골의 고려침입」「처인성 전투」「김윤후」「삼별초」「쌍성총관부」「공민왕」「직지심체요절」「진포대첩」「요동 정벌」「위화도회군」「삼국사기」「명 태조 주원장」, 교과서 용어 해설 「강동 6주」「천리장성」「송상」「위화도 회군」, 고등학교 국사 7차 「거란의 침입과 격퇴」「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무신 정권의 성립」, 재미있는 초등역사 「서희」「고려청자」, 신편 한국사 15권 「금과의 통교」 17권 「≪삼국사기≫의 편찬」, 한국문화사 「상감청자의 제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개경, 후삼국 통일, 서희, 시무28조, 천리장성, 묘청의 난, 만적의 난, 삼별초항쟁, 기철,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 국립중앙박물관 (museum.go.kr)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청자 상감동채 모란무늬 매병」
  •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unescoicdh.org)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 국가기록원 「직지와 흥덕사지」 (theme.archives.go.kr)
  • 금성출판사 티칭백과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문화재청 2015년 8월 경판 수 81,352장 발표 인용)
  • Where sources disagree: Battle of Gwiju 1019 (우리역사넷, 7차 교과서) vs 1018 (3차 초등 교과서, the year the invasion began)
  • completion of the Cheolli Jangseong 1044 (우리역사넷) vs 104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Tripitaka Koreana 81,258 blocks (colonial-era count, includes Joseon recarvings) vs 81,352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recount, 2015)
  • inlaid celadon from the mid-12th century (우리역사넷 초등역사) vs common only from the late 12th century (한국문화사)
  • start of Yuan interference 1259 or 1270.

확인한 날: 2026-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