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정약용은 도르래 하나를 쓰면 50근의 힘으로 100근을, 둘을 쓰면 25근의 힘으로 100근을 든다고 썼고, 그가 고안한 기중기는 3년이 채 안 걸린 화성 축성에 쓰였습니다.
1590년대에는 일본의 침략을, 1600년대에는 만주족이 세운 청의 침입을 겪은 뒤 조선은 무거운 숙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땅을 기록한 토지 대장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농민은 가난했습니다. 조정에서 벌어지는 학문 논쟁은 백성의 날마다의 생활과 동떨어져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1600년대부터 몇몇 학자는 토지와 세금, 상업과 기술을 실제로 어떻게 고칠 수 있을지를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뒷날 역사가들은 이 학자들의 학문을 하나로 묶어 실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실학은 흔히 실제 생활에 쓰이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토지를 고치자는 사람들
실학의 첫 번째 흐름은 농업과 토지 문제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이라는 책에서 땅을 실제로 경작하는 사람들에게 땅을 더 고르게 나누어 주자는 균전론을 내놓았습니다. 백과사전처럼 많은 내용을 담은 『성호사설』을 쓴 이익은 이와 다른 방법을 내놓았습니다. 집집마다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최소한의 땅을 정해 두고, 그 땅만큼은 사고팔지 못하게 하자는 한전론입니다. 그러면 어떤 집안도 가진 것을 모두 잃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두 방안 가운데 어느 것도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방안은 농민이 왜 자기 땅을 잃는지를 학자들이 깊이 따져 보았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사람들
두 번째 흐름은 흔히 북학파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조선이 청나라의 상업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무렵 많은 조선 학자들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얕보고 있었으니, 쉽지 않은 주장이었습니다. 박지원은 1780년 사신단을 따라 열하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때 열하에서는 건륭제가 일흔 살 생일인 칠순을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박지원은 이 여행을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썼습니다. 이 생생한 여행기에는 수레와 벽돌, 시장과 길에 대해 꼼꼼히 관찰한 내용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의 벗 박제가는 1778년 『북학의』를 썼습니다. 박제가는 물자를 실어 나르려면 수레와 배가 꼭 필요하며, 상업이 나라를 더 부유하게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학이라는 이름도 북쪽의 청나라에게서 배운다는 뜻입니다.
정약용과 수원 화성
호가 다산인 정약용은 이런 여러 흐름을 하나로 모은 학자로 흔히 평가받습니다. 그는 정조를 섬겼습니다. 정조는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왕위에 있으면서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 재능 있는 학자들을 모았습니다. 1792년 정조는 정약용에게 수원에 새로 쌓을 성을 설계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공사는 1794년에 시작해 1796년에 끝났습니다. 성곽의 길이는 5.74km이고, 성문 네 곳과 대포를 쏘는 포루, 지휘소인 장대 등을 갖추었습니다. 공사의 전 과정은 자세한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었고, 이 기록은 지금도 성을 보수할 때 기준으로 쓰입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습니다. 설계를 맡은 학자의 계획이 이렇게 실제 성으로 남은 것입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의 벼슬길도 갑자기 끝났습니다. 1801년 정약용은 천주교 탄압에 휘말려 유배되었고, 주로 남쪽 끝의 강진에서 18년 가까이 지냈습니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 긴 시간을 책을 쓰는 데 쏟았습니다. 1818년에 완성한 『목민심서』는 고을을 맡은 수령이 공정하게 다스리고 백성을 보호하는 방법을 담은 안내서입니다. 이 책은 세금을 거두는 일부터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일까지 두루 다룹니다. 같은 시대의 흐름에서 나온 또 하나의 성과로 『대동여지도』가 있습니다. 김정호가 1861년에 나무판에 새겨 찍어 낸 전국 지도입니다. 전국을 22첩으로 나누어 접어 두었다가, 나란히 펼쳐 이어 붙이면 하나의 큰 지도가 됩니다.
- 1776: 정조가 즉위하고 규장각을 둡니다.
- 1778: 박제가가 『북학의』를 씁니다.
- 1780: 박지원이 열하에 다녀옵니다(『열하일기』).
- 1794~1796: 수원 화성을 쌓습니다.
- 1818: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완성합니다.
- 1861: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듭니다.
| 실학 | 개혁을 고민한 학자들을 뒤에 묶어 부른 이름 |
| 유형원 | 『반계수록』, 균전론 |
| 이익 | 『성호사설』, 한전론 |
| 박지원 | 1780년 여행기 『열하일기』 |
| 박제가 | 『북학의』(1778), 수레·배·상업 |
| 정약용 | 화성 설계, 거중기, 『목민심서』 |
| 수원 화성 | 1794~1796년에 쌓은 5.74km 성곽 |
- 실학은 1600년대 이후 실제 개혁을 고민한 학자들을 뒤에 묶어 부른 이름입니다.
- 한 흐름은 토지 개혁을, 북학파는 청나라에서 배우기를 주장했습니다.
- 정약용은 화성(1794~1796)과 공사에 쓴 거중기를 설계했습니다.
- 『목민심서』(1818)와 『대동여지도』(1861)가 이 시기의 성과입니다.
- 『열하일기』를 쓴 사람은?
- 박지원
- 박제가
- 이익
- 김정호
- 박제가가 『북학의』를 쓴 해는?
- 북학파가 주장한 것은?
- 청의 상업과 기술을 배우자
- 청과의 국경을 닫자
- 과거를 없애자
- 도읍을 옮기자
- 화성은 1794년에 시작해 1796년에 완성했습니다. 두 해는 몇 년 차이인가요?
- 정약용에 따르면 도르래 하나로 100근을 들 때 필요한 힘은 몇 근인가요?
- 도르래 둘이면 100근을 드는 데 몇 근의 힘이 드나요?
- 화성 성곽의 길이는 몇 km인가요?
- 『목민심서』는 무엇에 관한 책인가요?
- 수령이 다스리는 법
- 성을 쌓는 법
- 청나라 여행
- 조선 지도
- 『대동여지도』를 만든 해는?
- 『대동여지도』는 몇 첩으로 되어 있나요?
- 팔 수 없는 최소한의 땅을 정해 두자고 한 사람은?
- 이익
- 유형원
- 박지원
- 정조
이 과정의 출처 (9)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contents.history.go.kr): 한국사 연대기 조선·근대 (한양 천도, 경복궁, 한양도성, 훈민정음, 자격루, 임진왜란, 한산도 해전, 명량해전, 이순신, 실학, 북학의, 정약용, 척화비, 강화도 조약, 환구단)
- 신편 한국사 22·23권 (태조 즉위의 승인과 국호개정, 문과·무과·잡과)
- 우리역사넷 용어 (과거 제도, 상민, 목민심서)
-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 사료로 본 한국사 (정약용의 거중기, 강화도 조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노량해전, 명량대첩, 대동여지도, 열하일기, 박지원, 균전론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digital.khs.go.kr): 경복궁, 수원 화성
- 국가유산청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heritage.go.kr): 훈민정음 해례본
- 국립중앙박물관 대동여지도 전시 안내 (2026)
- Lunar-calendar dates are given as recorded in the Annals.
확인한 날: 2026-10-17